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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지식

라이브볼 시대의 신호탄 베이브 루스의 홈런과 패러다임의 변화

데드볼 시대와 라이브볼 시대

클레이튼 커쇼와 전설적인 투수를 비교할 때 라이브볼 시대라는 말이 꼭 들어가는데요, 메이저리그에서 선수의 기록을 분류할 때 데드볼(Dead-ball era) 시대와 라이브볼(Live-ball era) 시대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반발력 있는 공을 사용한 시점부터 라이브볼 시대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또 우리는 메이저리그에서는 극단적인 스몰볼이 없는 줄 알고 있는데요, 그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사실과 어떻게 다른지 라이브볼 시대가 어떻게 왔는지 데드볼 시대부터 차근차근 다루어 보겠습니다. 


데드볼 시대는 1901[각주:1]년부터 1919년까지를 말하는데요, 데드볼 시대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데드볼 시대의 공은 반발력이 없어 아무리 잘 맞아도 홈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데드볼 시대는 투수에게 유리한 기형적인 기록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데브볼 시대를 살았던 사이 영(Cy Young, 1890~1911)이 위대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룩한 메이저리그 최다승인 511승은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4차원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요, 데드볼 시대에 만들어진 기록이기에 리이브볼 시대를 살아가는 한 깨기 불가능한 기록입니다.  


데드볼 시대는 리그별 대략 10개 정도의 홈런왕이 즐비하던 시대였어요. 1905년 프레드 오드웰(Fred Odwell)과 1909년 타이 콥(Ty Cobb)은 9개의 홈런으로 메이저리그 전체 통틀어서 홈런왕이 되기도 했어요. 그 당시 홈런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반발력이 없는 데드볼 외에도 야구장의 크기가 한몫했어요. 


투수 친화적인 야구장

시카고 컵스 홈구장(West Side Grounds)의 센터 길이가 560피트(170.7m)에 달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Huntington Avenue Grounds)은 더 심했는데요, 센터 펜스까지 거리가 무려 635피트(193.5m)였습니다. 과장한다면 야구장 안에 야구장 4개를 만들 수 있는 그런 구장이었죠.


데드볼 시대는 공을 쳐도 멀리 날아가지 않았고 투수 친화적인 구장에서 홈런을 보는 것은 굉장히 귀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선수들은 짧은 안타와 민첩하고 기민한 주루 플레이가 야구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보스턴 레드 삭스의 홈구장(Huntington Avenue Grounds) 구장 크기 = 635피트(193.5m) boston redsox

보스턴 레드 삭스의 홈구장(Huntington Avenue Grounds) 구장 크기635피트(193.5m)


파울 스트라이크 규칙

1901년 내셔널리그는 파울 스트라이크 규칙을 적용했고 1903년 아메리칸리그에서도 그 규칙을 적용합니다. 이전에는 파울이 스트라이크로 인정되지 않아 타자가 원하는 공이 오지 않으면 파울로 걷어냈습니다. 파울 스트라이크 규칙이 적용되자 투수들이 유리해집니다. 타자에게 불리한 파울 스트라이크는 데드볼 시대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데드볼 시대의 대표 타자, 타이 콥

타이 콥은 데드볼 시대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타자였습니다. 타이 콥은 메이저리그 통산 최고 타율인 .366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타이 콥은 1905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1928년까지 24년을 뛰었는데요, 그 기간 메이저리그 평균 타율이 .264였으니 그의 기록은 폄하할 수 없는 기록이지요. 


같은 시대에 뛰었던 베이브 루스는 세계적[각주:2]으로 잘 알려졌지만, 메이저리그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타이 콥이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타이 콥이 현역 시절에 좋은 평판을 받지 못했던 선수고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아주 더럽고 잔인한 야구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죠.


타이 콥은 전형적인 데드볼 시대의 선수였습니다. 데드볼 시대에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치고 달리고 상대의 허점을 찾아내는 전형적인 스몰볼을 해야 했어요. 타이 콥은 좋게 보면 투지고 나쁘게 보면 독하고 사악했으며 잔인하기도 했어요. 그는 슬라이딩할 때 뾰족한 [각주:3]스파이크로 상대 수비수를 위협했어요. 당시 선수들은 그의 행동에 더러워서 피하는 쪽에 가까웠어요.



데드볼 시대 타이 콥을 가장 잘 설명한 사진, 격투기 시합 사진이 아니라 야구 사진이다. ty cobb

데드볼 시대 타이 콥을 가장 잘 설명한 사진, 격투기 시합 사진이 아니라 야구 사진이다.


데드볼 시대 최악의 시기

데드볼 시대 최악의 시기가 있다면 1908년입니다. 메이저리그 전체 평균 타율이 .239를 기록하였고 전체 ERA는 2.39에 달하는 극악의 투고타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경기당 평균 득점은 3.5점이었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참다못해 항의하기 시작했어요. 


반발력을 위한 야구공의 코어, 코르크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1909년 벤 쉬베(Ben Shibe) 코르크가 가운데 들어간 공을 고안해냅니다. 메이저리그에 반발력이 있는 공이 공급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타율은 극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1910년 메이저리그 전체 타율이 .249에서 1911년 .266로 뛰어올랐어요. 홈런수도 1.4배나 올라갑니다. 

반발력을 위한 야구공의 코어, 코르크

데드볼 시대와 스핏볼

메이저리그의 높아진 타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12년 이후 타율은 계속 떨어져만 갔어요. 떨어진 시기는 스핏볼을 탄생 시기와 맞물렸습니다. 1913년 러스 포드(Russ Ford)는 우연히 스핏볼(Spitball)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콘크리트 벽에 공을 흠집을 냈는데요, 그 공으로 던졌더니 공에 엄청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패스트볼을 던지는데 너클볼 같은 공 변화가 생겼던 겁니다. 


평범한 투수였던 러스 포드는 1912년 3.55였던 평균자책점이 1913년에는 2.66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투수들은 이 스핏볼 기술을 배웠고 타자들은 구위 변화가 엄청났던 스핏볼 때문에 아주 힘들어했어요. 평균자책점은 3점대에서 2점대로 떨어지고 맙니다. 


데드볼 시대에는 야구공이 해어질 때까지 재활용했어요. 그러다 보니 메이저리그에 스핏볼이 점차 많아지고 흠집이 난 야구공을 쓰게 된 투수는 원하지 않았던 스핏볼을 던지게 됩니다. 침도 뭍이고 바셀린도 바르고 진흙을 묻히는 등 이런 투구들이 날로 성행하게 됩니다. 이런 공을 통칭해 스핏볼(부정한 볼)이라고 부릅니다. 


스핏볼이 금지된 후에도 선수들은 글러브에 에머리[각주:4] 보드를 숨겨 몰래몰래 공을 흠집 내기도 했고 포수가 심판에게 공을 받아 투수에게 공을 건네주는 척하면서 공에 흠집을 내기도 했죠. 


이용훈 스핏볼 Spitball

이용훈 스핏볼 Spitball

더러워진 공을 왜 쓸까?

포수가 파울팁이 되거나 원바운드 된 공을 투수에게 던져주기도 하는데요, 왜 공을 바꾸지 않고 그냥 던져주는지 의아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공에 상처가 나면 날수록 투수에게 유리해지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라면 투수가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스핏볼 이용훈 사건

프로야구 2군에서 퍼펙트를 기록한 이용훈이 2012년 KIA 타이거즈와 시합에서 스핏볼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용훈이 야구공을 이빨로 물어뜯는 장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죠. 이용훈은 인터뷰에서 "공에 실밥이 튀어나와 이빨로 제거한 것이다. 오해를 살 수 있는데 일종의 버릇이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진 보니 버릇처럼 보이네요. 경기 중에 공을 자주 바꾸기 때문에 매번 물어 뜯지 않는다면 큰 상관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스핏볼 원리 

스핏볼은 부정하게 변형시킨 공을 모두 일컫는 야구 용어가 되었는데요, 부정한 공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침, 땀, 머릿기름, 파라핀, 윤활제 등을 손에 바르면 공의 회전력이 줄여 역회전이 덜 걸리는 스플리터 같은 구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회전이 없으면 없을수록 너클볼 같은 움직임이 생기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왔습니다. 에머리 보드(일종의 사포)를 이용해서 몰래 공을 흠집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에 흠집이 나면, 공에 비대칭적인 힘이 걸려서 이상한 궤적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회전축의 한쪽 끝 부분에 흠집을 냅니다.



라이브볼 시대의 신호탄 베이브 루스의 홈런과 패러다임의 변화

라이브볼 시대의 신호탄 베이브 루스의 홈런과 패러다임의 변화


재미없는 야구, 데드볼 시대

야구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재미있어야 했어요. 데드볼 시대는 도루, 희생번트 등 전형적인 스몰볼 야구를 추구하고 있었어요. 현대 야구보다 도루 수가 2배나 많았고 희생타(희생번트 포함)가 현대 야구보다 3.8배 더 많았습니다. 


야구를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 야구는 정말 이해 안 가는 스포츠였어요. 어떤 경우에는 아주 큰 타구가 나왔음에도 아웃이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땅볼임에도 불구하고 안타로 인정받습니다.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큰 흥밋거리가 아니었죠. 관중들은 타이 콥처럼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는 선수를 이해하지 못했고 또 환호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데드볼 시대 종결자 베이브 루스

극악의 투수 친화적인 데드볼 시대에 메이저리그 산업의 근간을 뒤흔드는 타자가 나타납니다. 조지 허먼 루스(George Herman Ruth)가 본명이었던 전설의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가 1919년 데드볼 시대의 종지부를 찍는 신호탄을 쏘아 올립니다. 데드볼 시대에는 10개 정도만 쳐도 홈런왕이 되었을 정도로 홈런 개수가 적었습니다. 1915년 개비 크래배스(Gavvy Cravath)가 친 홈런 24개가 메이저리그 최고 기록이었는데요, 베이브 루스가 홈런 29개로 그 기록을 깹니다. 관중들은 베이브 루스의 홈런에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베이브 루스는 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타이 콥의 플레이처럼 지저분한 야구가 아니라 불꽃놀이처럼 야구가 축제의 장이 된 것입니다. IMF 시절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야구가 위로가 되었듯이 대공황의 황폐함 속에 고통받는 미국인들에게 베이브 루스 홈런은 아주 큰 활력소가 되어 주었습니다. 안타 치고 도루하고 희생번트하는 그런 스몰볼 야구가 아니라 롱볼(long ball)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런 매력적인 야구가 관중을 구름떼처럼 몰고 왔습니다. 


논란이 있겠지만,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감독 제리 로이스터의 등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이언츠 야구를 순식간에 빅볼야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닥공[각주:5]이었죠. 타자들은 로이스터의 영향을 받아 두려움 없이 아주 공격적인 야구를 했어요. 팬들은 더 이상 번트로 대변되는 스몰볼 야구를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당시 잠자고 있던 모든 팬이 로이스터가 만들어낸 새롭고 재미나는 야구를 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았으니까요.



베이브 루스 1919년

130경기    543 타석 29 홈런 .322/.456/.657/1.114

  17경기 133.1 이닝 9승 5패


라이브볼 시대를 열기 위한 해결책

베이브 루스의 홈런 29개는 투수와 야수를 함께한 기록이라 더 가치가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베이브 루스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그의 홈런이 몰고 온 야구의 인기에 무척 고무되었습니다. 이런 야구의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 타자에게 유리한 몇 가지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스핏볼 금지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스핏볼[각주:6]을 던지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합법적이었던 스핏볼을 금지하자 반발하는 투수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7명의 타자에게만 그들이 은퇴할 때까지 스핏볼을 던지는 것을 허용해주었습니다. 


깨끗한 공 사용

메이저리그에서 더 이상 공을 재활용하지 않았고 깨끗한 공으로 경기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타자들은 괴상하고 변덕스러운 공과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책 덕분에 1920년 이후 타율은 2할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올라갔고 평균자책점도 2~3점대 평균자책점에서 4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상승하게 됩니다. 1920년 베이브 루스는 투수[각주:7] 역할보다는 타자 역할에 집중했고 그 결과 54개의 홈런을 만들어 냅니다. 베이브 루스가 라이브볼 시대를 열었습니다. 



1920년 야구 역사의 중요한 해

1920년은 야구 역사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지는 해입니다. 1920년은 라이브볼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고 베이브 루스가 양키스로 이적해 양키스 제국 건설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해는 밤비노의 저주가 시작된 해이기도 합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1910~1920년에는 월드시리즈에서 5번 우승하며 최고의 팀이었지만 그 자리를 양키스에게 내줘야 했죠. 보스턴이 월드시리즈 우승할 때까지 86년이 걸리게 됩니다.


데드볼 시대 보스턴 레드삭스 6회 우승

1903년 월드시리즈 우승 - 보스턴 아메리카

1912 월드시리즈 우승

1914 월드시리즈 우승 / 베이브 루스   2승  1패 3.91 ERA /   0홈런 .200

1915 월드시리즈 우승 / 베이브 루스 18승  8패 2.44 ERA /   4홈런 .315

1916 월드시리즈 우승 / 베이브 루스 23승 12패 1.75 ERA /  3홈런 .272

1918 월드시리즈 우승 / 베이브 루스 13승   7패 2.22 ERA / 11홈런 .300



영원한 기록으로 남을 것 같았던 베이브 루스의 60홈런은 로저 마리스(1961년 홈런 61개)에 의해 깨지고 맙니다. 그리고 약물 시대 선수들은 쉽게 60홈런 이상을 치며 진정한 홈런의 가치를 훼손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베이브 루스는 데드볼 시대에 야구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진정한 홈런 타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Reference

Fangraphs.com

Baseball-Reference.com, 

The Physics of Baseball (Robert K. Adair)

The Science of Hitting (Ted Williams, John Underwood and Robert Cupp), 

Dead-ball era (Wikipedia), Live-ball era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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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01년부터 아메리칸 리그가 출범해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가 공존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메이저리그가 된 것이다. 파울 스트라이크 규칙이 1901년 내셔널리그에 채택되고 1903년 아마레칸리그에 채택된다. 이전에는 파울이 스트라이크로 인정되지 않아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였다. 파울 스트라이크 제도 때문에 투수가 유리해진 것은 사실이다. [본문으로]
  2. 야구를 하지 않는 나라에서 베이비 루스를 알까? [본문으로]
  3. 프로야구 정근우 선수가 이 사건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현대판 타이 콥이었다. 아무리 잘해도 인기 없는 그런 유형의 선수가 바로 타이 콥이었다. [본문으로]
  4. 에머리 보드 Emery board, 손톱 손질할 때 쓰는 도구. 일종의 사포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닥치고 공격 [본문으로]
  6. 채프먼의 스핏볼에 맞아 사망하게 되고 이 사건과 맞물려 스핏볼이 사라지게 된다. 타자가 스핏볼의 궤적을 예측하기 힘들어 피할 수가 없다는 논리다. [본문으로]
  7. 베이브 루스 기록 1920년 4이닝 4.50 ERA [본문으로]